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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크레이프

가설 없는 탐구 / 고객은 생각보다 더 비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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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통찰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최대한 편견을 배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좋다.

어쭙잖게 알고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식을 비워 내고 무지에서 시작하는 게 더 유용하다는 관점이다.

편견 없이 현상을 연구하는 방법이 곧 철학이다. 철학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호기심에서 시작되며 원점에서 재시작이 필요할 때, 철학적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경제학·경영학적 접근은 일견 합리적인 듯 보이지만, 고객의 행동 양식과 심리를 이해하는 도구로서는 완벽하지 않다. 전통 경제학은 '인간은 가장 경제적이고 합리적으로 결정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모든 인간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용을 보기 위해 꼼꼼히 계산하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신발을 사러 간다고 치자, 하나의 신발을 집어 들어 계산하기까지 어떤 의사 결정 과정을 거치게 될까? 아래 세 가지 보기 중에 하나씩 골라보자'

 

  1. 나는 내가 사고 싶은 신발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정확한 사이즈와 원하는 색도 알고 있으며, 어디서 가장 저렴하게 살 수 있는지와 원하는 색도 알고 있으며, 어디서 가장 저렴하게 살 수 있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목표한 상점에서 의도했던 가격대에 맞춰 원했던 신발을산다.
  2. 나는 신발을 사고 싶지만 어떤 모양, 어떤 브랜드의 신발을 사야 할지는 모르겠다. 어디서 사야 할지도 잘 모른다. 가게를 돌아다니다가 제법 괜찮은 신발을 발견하고 매장에 들어가서 그것을 산다.
  3. 나는 신발이 필요한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어찌 됐든 산다.

 


 

 

전 세계 신발의 80%가 3번 가설에 따라 팔린다. 

대부분 어쩌다 보니 신발을 사고난 후에 "나는 사실 이런 신발이 필요했고, 생각했던 가격대에서 좋은 브랜드의 물건을 잘 산 것 같다"라고 나중에 합리화한다. 

 

많은 기업들은 '고객은 합리적인 인간이며, 특정 브랜드, 가격대, 디자인의 제품을 원한다' 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조사해 보면 고객은 자신이 어떤 물건을 원하는지 아닌지도 모른 채 쇼핑을 하며, 회사가 달아 둔 제품 정보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회사는 숫자와 데이터로 고객을 분석하려고 하지만, 사실 고객은 그럴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고객의 비합리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학자들이 연구한 바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는 물건이라면 그럴 이유가 있을 테니 나도 따라서 산다는 '밴드왜건 효과'와 반대 개념인 '스노브 효과'가 있다. 서로 모순되지만 엄연히 상존한다.

최소 비용 및 최대 효용 같은 경제학적 판단보다는, 다른 사람의 구매 여부가 내 구매에 영향을 준다는 심리학적 분석이다.

 

흔히 사실이라 믿기 쉬운, 그러나 비즈니스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에 대한 전제는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개별적이며,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다.

2) 인간은 자신의 의향·의도를 잘 알고 있다.

3) 인간은 다양한 선택지를 비교 평가한 뒤, 자신에게 최적의 제품을 선택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1)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의사결정은 자신이 속한 사회·조직에 따라 이뤄진다.

2)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3) 인간은 오랜 기간 고민하지 않고 순식간에 판단을 내린다.

 

전통 경제·경영학에서는 왜 인간을 합리적인 존재로 규정했을까? 에 대한 답은 그래야 편하기 때문이다.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은 '불확실성'인데 불확실한 요소는 대내외에 산재해 있다. 공급망, 생산유통, 판매, 팬데믹, 기후변화까지 모두 기업 경영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상황에서는 도무지 여러 상황에 통용되는 원칙을 세울 수가 없다. 그래서 경제·경영학이 만든 각종 모델의 '예측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간을 '합리적인 존재'로 가정한 셈이다. 

 

숫자는 진실의 파편일 뿐이다. 

 

기업활동은 곧 숫자로 대변되며, 대부분의 기업은 숫자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투자자들은 재무재표 속 숫자를 보고, 회사가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한다. 자본과 부채 등 자산 규모를 보면, 이 기업이 한 나라나 업계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한 해 매출액, 영업이익, 그리고 증감률은 회사가 잘 성장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숫자는 기업의 성과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기업 간 비교를 수월하게 돕는다는 점에서 편리한 측정 도구다. 숫자를 들이밀면, 투자자나 광고주 등 기업의 이해 관계자를 설득하기도 쉬워진다. 숫자는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하는 건 숫자가 진실을 오롯이 보여 주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2008년 금융위기의 촉발 당시 10년간 이어지던 부동산 시장 호황, 주택 가격 상승률등을 배경으로 부실 대출고 적정 대출 수백 건을 한데 묶어 부채담보부증권이나 자산유동화증권 같은 복잡한 금융 상품을 팔았는데, 부실률이라는 '숫자'는 양호해 보였기 때문이다. 마구잡이 대출을 가능하게 했던 '호황'은 어느날 끝났고 경제가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기업은 종종 소비자를 대상으로 척도 조사, 선호도 조사 등을 한 뒤 이를 수량화해 신제품을 개발하거나, 기존 제품을 개선한다. 그러나 소비자의 목소리를 100% 따라가는 게 정답일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점이 불편한지를 잘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무리 숫자가 믿음직스러워 보여도 100% 확신해서는 안 된다고 미켈 라스무센 CEO는 언급했다.

 

"숫자가 잘못됐다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들어맞는 부분이 맞죠. 그런데 만약 틀리다면요? 또는 숫자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요인이 있고, 이게 기업의 성패와 직결된다면요? 고객은 때로 기업이 예측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합니다. 잘못된 신제품 하나로 망한 회사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중요한 건 숫자와 데이터에만 연연하다가 세상이 굴러가는 걸 놓칠 때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겁니다. 기존 경영학의 기술적인 접근이 고객을 이해하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확신했다가는 큰 위기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영화 '빅쇼트'는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동산거품이 어떻게 형성되고 무너졌는지에 대해 다룬 실화를 기반한 영화다.

마이클 버리는 부동산 시장의 폭락을 예측했고, 모건스탠리의 헤지 펀드인 프론트포인트 파트너스의 스티브 아이즈먼이 버리의 펀드에 돈을 투자했다. 아이즈먼은 현장 조사를 나가서 서브 프라임 대출을 받은 채무자들을 직접 만나고 대출이 얼마나 얼렁뚱땅 이뤄졌는지를 보고 들었다. 키우는 개 이름으로 대출을 받은 집주인, 이자 상환마저 수개월째 연체해 대저택을 비우고 도망간 채무자들이 부지기수인 상황을 직접 확인한 아이즈먼은 버리의 역투자가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고 2000년대 후반 금융위기 속에서도 성공한 투자자가 됐다. 숫자에만 매이지 않고, 현장을 직접 다니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고객을 연구한 덕분이었다.

 

숫자의 유혹을 거부한 산타마리아노벨라

 

이탈리아 피렌체에 본사를 둔 화장품·스킨케어 브랜드 산타마리아노베라는 좋은 사례이다.

400년이 넘는 세월을 지속할 수 있던 이유는 기업의 철학 덕분이었다.

 

알판데리 회장은 '수익을 희생하더라도 확장은 천천히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도 않았으며 벌어들인 돈을 제품 개발에 오롯이 재투자하면서 천천히 발전해 왔다.

 

오랫동안 정체하던 회사의 매출이 빠르게 늘면 경영자는 더 빨리 더 가파르게 숫자를 끌어올리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힐 수 있다. 그러나 산타마리아노벨라는 '고객을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재무제표 위의 숫자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로 삼고 유혹에 빠져들지 않았다. 수많은 기업이 소비자를 위한다고 하면서 숫자에 빠져들고 소비자와 멀어진다. 특히 기업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런 현상이 자주 나타난다. 해답은 간단하다. 숫자 대신 사람을 보면 된다.

 

"종종 '우리는 단지 물건을 파는 게 아닙니다.'라고 주장하는 회사들이 있죠. 이들은 사업을 바라보는 시각이 한 차원 더 높습니다. 이를테면 스타벅스는 커피를 팔지만 그보다 '고객에게 여유로운 시공간을 제공한다'고 믿습니다. 코카콜라도 콜라를 앞세우기보단 '고객에 즐거움을 준다'고 합니다. 이들은 커피와 콜라라는 상품을 기반으로 한 서비스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자 노력합니다. 그 결과, 회사 구성원들은 '물건만 잘 팔면 됐지'라고 생각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더 나은 고객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가'를 고민합니다. 제품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제품 단계에서의 개선책만 고려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고객 만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더 큰 시야로 사업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게 말장난 같아 보이지만 기업 내부에서는 의외로 큰 효과를 냅니다."

 

조직 구성원이 시대의 변화를 알아채고, 이를 구성원 전체가 공감할 수 있다면 관성에서 벗어나는 데 따라붙는 고통은 최소화하면서 조직이 원하는 방향으로 쉽게 움직일 수 있다. 그래야 기업이 새 기회를 마주 했을 때 이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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